안진국
심연의 미메시스: 감각적 파티클로 직조된 회화
권순욱 작가론
안진국 미술비평
다성적 목소리가 넓은 음역대를 가지고 진동하는 세계. 바로 권순욱의 세계다. 추상적 형상과 구상적 풍경을 넘나들고, 자유로움과 치밀함이 공존하며,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는 그의 작업은 익숙한 모더니즘 형식을 띠면서도 낯선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내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러 표현 방식이 중첩되고, 감각적 파티클들이 건축적으로 축적된 권순욱의 회화는 다변적이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세계를 아무 말 없이 그려 나간다. 우리는 권순욱의 세계를 볼 수 있지만, 그의 세계를 알 수 없다. 다변과 무언 사이, 채움과 비움 사이, 그 사이에 권순욱의 예술은 존재한다.
기억과 사색의 심도(深度)
권순욱의 작업에서 과거와 현재는 아직 아닌 시간에 중첩된다. 기억의 공간에서 끌어올린 다양한 형상들은 현재의 시간과 얽힘 속에서 기억 저편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하고, 선과 색채가 구축한 추상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그가 그린 화면에는 닿을 듯 말 듯한 ‘미연(未然)’의 시공간이 펼쳐진다. 그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무언의 다성적 목소리는 정물이나 꽃, 건축물처럼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구상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즉흥과 계획을 넘나드는 추상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세계에서 구상과 추상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작가의 그림은 기억과 사색의 편린들이 현재의 시간을 뚫고 드러낸 미증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사색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감각이다. 따라서 기억과 사색의 편린들은 감각의 덩어리들로, 그것이 작가의 내부에서 발아하여 형태를 가질 때 구체성을 띨 수도, 무언가 아른거리는 듯한 몽환적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권순욱의 세계가 현재의 시간과 만나면서 화면 위로 부상하게 되는 형상들은 구체성과 추상성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기억과 사색의 해상도 차이일 뿐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기 힘들다.
그의 작업은 사실상 기억과 사색의 감각질을 그리는 ‘미메시스’(mimesis)라고 할 수 있다. 미메시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의 ‘순수한 형상’을 포착하여 예술의 장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모방(imitation)이 아닌, 재현(representation)이다. 그리고 이 재현은 핵심을 그려낸 것으로, 모방보다 더 큰 범주의 표현이다. 권순욱은 자신의 인지적 장(場)과 접촉한, 체화된 과거와 현재의 암묵지(暗默知)를 시각화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억과 사색의 감각질은 재현의 세계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자신의 세계에서 그 근본적 실체, 즉 ‘순수한 형상’을 포착한다. 이 형상은 시각적 외형이 아니라, 감정의 순수한 형상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감각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린 형상에 층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추상화와 정물화, 그리고 도시 풍경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작업은 기억과 사색의 심도(深度)와 연결 지을 수 있다. 마치 세상을 근경, 중경, 원경으로 바라보듯, 권순욱은 기억과 사색의 감각질을 아주 가까이에서, 아니면 조금 떨어져서, 혹은 아주 멀리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초점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 아주 가까이 있는 대상은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다. 작가가 그린 추상적 형상은 마치 초점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듯이 감각질을 아주 가까이에서, 작가 자신과 일체화함으로써 감각 그 자체를 형상으로 구현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감각질 그 자체가 얽히고 중첩되어 시각적 형상으로 현현(顯現)한 것이다. 정물화의 꽃과 정물은 기억과 사색의 감각질을 조금 떨어져 바라본(중경) 형상의 상징체라 할 수 있다. 이는 감각질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는 시도로 읽힌다. 이로써 ‘나’와 나의 ‘바깥’이 분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작업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다성적 목소리가 넓은 음역대로 진동하는, 복잡하고 다변적인 권순욱의 세계에서 몇 가지의 사물로 복잡다단한 감각질을 드러내기에는 불충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가가 최근 자주 그리는 도시 풍경(원경)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몇몇 작업에서 집들의 안에 정물화를 그리듯 화병을 하나씩 그려 넣는다는 것이다. 마치 정물화 작업이 풍경 작업으로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가 한 송이 꽃, 하나의 화병을 그렸던 중경의 심도가 그가 지닌 다채로운 감각질을 담아내기에 불충분했음을 보여주는 방증 아닐까.
‘바깥’과 상호 침투하는 도시 풍경
기억과 사색을 원경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도시 풍경 작업이다. 그런데 사실 도시 풍경 작업은 추상 작업과 동전의 양면처럼 이어져 있다. 권순욱의 추상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사각형 형태들이 파티클 형태로 종·횡렬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건축적 양식을 띠고 있는데, 이는 사각 창문을 지닌 사각형 형태의 집들로 구성된 그의 도시 풍경 작업과 유사하다. 그의 추상 작업은 어떻게 보면, 도시 풍경의 추상적 형태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이는 권순욱의 도시 풍경이 단순히 세상에 있는 사실적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확정될 수 없는 기표로 존재하는 감각질의 풍경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그가 그린 도시 풍경이 내면의 ‘미메시스’이며, 그의 세계를 ‘재현’한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그린 초기 도시 풍경은 마치 내면의 중층적 심연이 축적되어 나타나듯이 수직적인 구성을 보여준다(<아름다운 세상(행복이 머무는 곳)> 연작(2022), <아름다운 세상(여행)> 연작(2023) 등).
하지만 최근 도시 풍경 작업은 수평적 구성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 왔는가? 그의 세계에 현재의 사실적 세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최근 작가는 단순히 기억과 사색의 편린으로서 도시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재 풍경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질과 직조하여 그리고 있다. 이 때문에 사각 창문을 지닌 정형화된 집들이 다양한 형태로 변하고 다리와 산등성 등 사실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의 세계는 ‘바깥’과의 상호 침투적인 관계가 연속으로 일어나는 장소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권순옥의 세계는 다층적인 층위의 감각질이 들끓는 장(場)이다. 감정의 벡터들이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곳이다. 그의 회화는 지난날의 기억들과 사색의 편린들을 잇고 배치하여 현재의 시간에 드러낸 감각질의 형상이다. 권순옥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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