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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의 정체성과 차이, 그 경계
고충환 | 미술평론
서울프린트클럽은 1980년에 열린 첫 전시 이후 올해로 제 30회째를 맞이했다. 창립당시 박광진,
윤효준, 이영애, 전지원, 조수정, 한인숙 등 6명의 판화작가가 차입멤버로 참여했으며, 현재에는 편대한화를 대표하는 주요 여성작가들을 망라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 경향을 보면, 사실상의 성적 구별이 무의미한 기하학적 형태의 변주와 같은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여성작가 특유의
소재와 정서를 반영하는 편이며, 이로부터 여성의 성적 정체성으로 부를 만한 어떤 특질이 발견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영애, 전지원, 김란희, 서정희, 박지숙 등은 자연을 소재로 하여 자연을 노래하기도 하고, 자연을 넘어 삶과 우주의 상징적 의미를
끌어내기도 한다.
먼저, 이영애는 주로 낙엽을 소재로 하여 명과 암의 대비가 뚜렷한 화면 효과를 연출한다. 전지원이
주요 판법으로 도입하고 있는 메조틴트는 가장 정교한 판법으로서, 여타 판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소재와 치밀한 묘사에 어울린다. 김란희는
동판에다 들꽃의 이미지를 새겨 그린 후, 그 표면에다 잉킹을 한다. 박지숙은 입체와 설치에로까지 판화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서정희는 그 표면에
이미지가 새겨진 유리판(유리에창)을 사진이나 프린트 이미지와 중첩시키는가 하면, 종이 대신 판목이나 미세 알루미늄 망에다 이미지를 프린트하는
등의 판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키는 형식실험에 천착해왔다.
박지숙의 관심은 식물이 갖는 유기적인 구조와 그 생명력의 표현에 일관되게 맞춰져 있다. 근작에서는
그 표면에 식물의 이미지를 프린트한 투명한 아크릴 판 여러 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하거나, 프린트된 이미지를 레이저 커팅 기법으로써 절단하고
이를 중첩시킨다.
이경희, 김광숙, 이윤령 등의 판화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편,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을 엿보게
한다. 그러니까 현실로부터 소재를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가 현실에 속해져 있지 않은 것 같은 비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하면 조을선, 임정은, 정미옥, 오영재, 이상은 등은 기하학적 형태를 패턴화 하거나 변주한 다양한 형식실험의
성과를 보여준다.
오영재와 이상은의 작업이 이처럼 컴퓨터를 적극 차용한 디지털프린트로서, 그 변화된 환경이나 생리를 엿보게
한다.
현재 서울프린트클럽에는 대략 20여명에 이르는 여성판화작가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전시 때마다 대략 12명 정도의 회원작가들이 참여하는 편이다. 본회가 30여년을 훌쩍 넘긴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특정의 이념이나
의식을 공유(강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회의 결속력이나 지속성에 있어서 호의적인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는 그 자체가
한계일 수도 있다.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재생을 동반하지 않는 지속은 그 의미가 없으며, 이 때문에라도 역량 있는 신진 작가들의 수혈이 요구된다.
정체성의 확립과 차이의 수용이 부닥치고 만나지는 접점에 대한 모색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