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일깨우세요: 타비타 르제르
박예린
현재 프랑스령 기아나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아나-덴마크계 프랑스 작가 타비타 르제르(Tabita Rezaire, 1989-)의 작업은 성별과 인종을 둘러싼 부조리한 역사, 현대의 정보통신기술(ICT)이 제기하는 문제들, 그리고 사변적 상상력이 예고하는 우주와 영성적 차원의 미래라는 광범위한 시공간을 넘나든다.1) 특히 식민주의 (노예) 무역의 대상으로서 아프리카 대륙의 인간/비인간에게 가해져 온 강제 동원과 착취의 역사를 다루는 르제르는 이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문화 운동의 유산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전통적 서구 중심 서사와 기술 담론에 저항하는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의 SF적 상상력, 폭력과 차별의 구조를 인종, 계급, 성지향, 빈곤 등 다층적 맥락에서 고려하는 블랙페미니즘(Blackfeminism)의 상호교차성, 그리고 가부장제와 젠더 구조에 도전하는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사이버페미니즘(Cyberfeminism)의 접근성과 유동성이 그녀의 작업 맥락을 형성한다. 르제르는 아프로(블랙)-사이버-페미니즘의 교차적 가능성을 탐구한 가장 선구적인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10년대 중반부터 작업을 전개해 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자 무빙 이미지 연구 분야의 학술적 배경이 있는 젊은 작가로서, 타비타 르제르는 디지털 문화 생산 매체이자 확산의 플랫폼인 인터넷을 매개로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문화적, 시각적 저항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는 타비타 르제르의 극초기 작업들이 다루는 내용이자 그녀의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문제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아프로 사이버 저항 AFRO CYBER RESISTANCE〉(2014)은 작가 본인이 등장하는 렉처 퍼포먼스 영상으로, 이 영상에서 르제르는 온라인의 정보 흐름이 서구의 식민지적 패턴으로 재현되는 방식과 인터넷 공간에서 그에 저항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들의 예술 실천을 소개한다.2) 작가가 ‘아프로 사이버 저항(Afro Cyber Resistance)’이라 명명하는 이들의 실천은 아프리카의 신체와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과 잘못된 묘사에 맞서 아프리카 문화에 뿌리를 둔 독특한 시각 언어를 창조하고 온라인 정보의 일방적 흐름을 거스르며 인터넷을 창구로 이를 전파한다.
예컨대 케이프타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인 치무렝가(Chimurenga)는 2011년 제작한 아프리카 대륙의 문화에 관한 정보를 생산하고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위키아프리카 프로젝트(WikiAfrica project)’를 제작하였으며, 커스 그룹(Cuss Group)은 2013년부터 TV 매장, 인터넷 카페, 미용실, 길거리 등 도시의 다양한 공간에서 비디오 설치물을 영사하여 서구 미디어에서 위험한 도시로 묘사되어 온 도시의 실제 환경에 개입하고자 하는 ’비디오 파티(Video Party)’를 기획해 왔다. 한편 예술가 보고시 세쿠쿠니(Bogosi Sekhukhuni)는 웹사이트 제작 플랫폼인 뉴하이브(Newhive)를 활용하여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서구의 공포를 희화화하는 영상과 이미지를 디지털 콜라주한 작품 〈VIRUS SS 16〉(2014)을 제작한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타적이고 혐오적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성과 저항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 아래, 위와 같은 다양한 사례를 소개했던 타비타 르제르 본인의 작품 또한 제목 그대로 ‘아프로 사이버 레지스탕스’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화된 공간인 인터넷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에서 조금씩 사변적인 상상력이 더해진다. 르제르의 또다른 초기작인 〈바다 깊은 곳 Deep Down Tidal〉(2017)은 전세계 디지털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대양 횡단 광섬유 케이블이 근대 식민지 시대의 항로를 따라 깔려 있어, 디지털 데이터를 매개로 ‘전자 식민지주의(electric colonialism)’가 서구 식민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작가는 해저 통신망의 불균등한 설치라는 인터넷의 물리적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보다는 물과 바다가 신성한 물질이자 생명의 모태, 지식의 통로였음을 거듭 강조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기억과 교감하는 영성적 기술을 일깨우기를 촉구한다. 이 무빙 이미지는 2017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타비타 르제르의 첫 개인전 《이국적 무역 Exotic Trade》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전시 서문에서 작가는 "우리 자신과 서로를 지구와 다중 우주에 총체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탈식민주의 기술을 구상하고 있음을 밝힌다.3)
여기서부터 르제르는 작품에서 정신(영혼)/육체(장치)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우주의 유기적, 전자적, 영적 체계 간의 연결고리를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는 생물학적 유기체와 인간의 영적 능력,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네트워크가 양자적 차원에서는 본질적으로 소통 가능한 체계라는 작가의 생각에 기반한다. 일례로, 해당 전시에서 선보인 작가의 또다른 무빙 이미지 〈프리미엄 커넥트 Premium Connect〉(2017)에서 정보 통신 기술의 이미지는 아프리카의 점술 시스템, 땅속에서 번식하는 곰팡이의 네트워크, 조상과의 영적 소통, 양자 물리학의 이미지들과 병치된다. 정보 전달과 소통의 목적으로 활용되지만 서구의 합리주의, 위계적 지식체계로 오염되고 식민화 된 정보통신기술(ICT)은 먼 우주와 조상으로부터 전송되는 영적 채널링 혹은 텔레파시와 다르지 않은 과학 기술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영성 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의 유사성을,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와 유사하지만 광섬유 케이블 대신 에너지를 통해 조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고 물리적 서버 대신 우주에 저장되는 ‘코스모스 데이터베이스(cosmos database)’로 유비한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모든 존재가 ‘코스모스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되어 있음을 망각한 디지털 기술을 탈식민화하고 치유하기 위한 ‘디지털 치유 행동주의(digital healing activism)’로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한다. 즉, 영혼의 연결과 영성적 고양을 통해 지식 생산/소통 체계의 억압적인 식민적 위계를 치유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한한 치유와 생명력의 장소로서 여성성의 상징인 자궁의 이미지가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자궁은 생물학적 기관을 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를 근원으로 묶어주는 탯줄”이므로, 치유를 위해서는 우리의 모계 에너지, 즉 ’자궁-정신’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4)
이렇게 르제르의 작업은 과학 기술과 신비주의를 모태로 기묘한 접점을 만들어낸다. “과학은 우주를 이해하고자 바깥 세상을 탐구한다. 영성은 우주를 체험하고자 내면 세계를 탐구한다. 둘 다 창조의 근원을 탐색하는 행위다”라는 문장은 그녀의 세계관에 대한 적절한 요약일 것이다. 이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갤러리 4에서 타비타 르제르가 선보인 〈궤도 디아파종 Orbit Diapason〉(2021)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타비타 르제르의 작품 세계의 총체이자 상징과 은유가 넘쳐 흐르는 이미지와 텍스트로, 작가의 작업 맥락과 아프리카 신화의 배경 지식 없이 쉽게 이해하거나 해독하기 어렵다. 2채널 비디오 설치인 〈궤도 디아파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상이 투사되고 있는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황토색을 띤 오각형과 육각형 패널이 이어 붙어 있어 미래적이지만 동시에 마치 거대한 꿀벌의 집을 연상케 하는 반구체 안쪽에는 육각형 패널 중 2개가 무빙 이미지를 투사한다.
영상은 선조의 지식을 간직한 자이자 모두가 숭배하는 위대한 비단뱀 “어머니”를 부르는 여성의 노랫소리로 시작된다. ‘담발라(Damballa)’로 추정되는, 물가를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여성의 모습이 천천히 춤을 춘다. 아프리카 신화에서 뱀은 창조와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부두(Vodou) 신앙에서 등장하는 비단뱀 ‘담발라’는 생명과 창조, 조화와 치유의 여신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성한 중재자인 뱀에 이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선조와 교감하는 신성한 장소이자 줄루(zulu)어로 ’태양의 발생지(Inzalo y’Langa)’ 혹은 ‘아담의 달력(Adam’s Calendar)’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 스톤 서클이 등장한다. 이곳에서의 교감은 공명과 주파수, 소리 에너지 혹은 ‘차크라(chakra)’를 매개로 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만, 일순간 내면의 신성과 사랑을 잃은 인간은 영적으로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다.
환상적인 우주의 모습과 그래픽으로 그려진 외계인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영상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지구 너머의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고자 하는 인류의 열망과 고도의 외계 문명이 지구를 침략해 문명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인류의 두려움을 짚어낸다. 그 두려움은 영성을 잃은 인류가 자연, 우주와 공존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정복과 굴복의 논리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서구 중심의 역사를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크린 위 첨단 과학 기술로 반짝이는 우주선으로 표상되는 인류 세력 확장의 야심은, 영적 의례를 통한 황홀경이나 세계 곳곳의 성지인 ‘스타게이트’를 활용하는 시공간의 초월보다도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어서 꿀벌과 벌집의 모습을 비추며 영상은 꿀벌 뿐만 아니라 온 우주와 만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어떻게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지만 궁리하는 과학의 기존 역할이 잘못되었음을 꼬집는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도 "강이 있고, 산이 있고, 커다란 호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체가 지구다. 따라서 작가가 보기에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자기를 훼손하면서 타자를 훼손”하는 것이며, “어머니를 훼손하면서 모든 피조물을 훼손"하는 것이다.
대신 영상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일깨우라”고 촉구한다. 인간 누구에게나 전사의 마음(남성성)과 어머니의 마음(여성성)이 존재한다면, 전사의 마음은 사물을 논리적으로 바라보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상하좌우 종횡무진” 생각한다. 나와 타자를 끌어 안고 어머니와 자연을 사랑하는 것. 영성적 합일을 통해 지구와 우주와 교감하는 것. 딸을 품에 꼭 안은 어머니와 함께 등장하는 작품 속 텍스트에서 모성(motherhood)이 타자성(otherhood)과 병치된 이유다 [도판]. 〈궤도 디아파종〉은 이번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화성(diapason)'으로 끝이 난다.
런던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타비타 르제르는 2019년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프랑스령 기아나에 머물며 치유 및 교육 센터인 아마카바(AMAKABA)를 운영하고 있다. 아마카바는 런던 서펜타인(Serpentine) 갤러리가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기획한 학제간 프로젝트인 ‘지구로 돌아가기(Back to Earth)’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기아나의 아마존 우림 깊은 곳에서 거주하면서 타비타 르제르는 아마카바에서 전통적 방식으로 카카오 농장을 운영하고, 자궁 건강을 위한 약초를 재배하며, 천연 염색과 아마존 토종 벌 양봉을 기획하는 등 농업 생태 농장을 꾸리고 있다. 또한 요가를 통한 몸과 정신의 합일, 천체 관찰을 통한 영성 체험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르제르는 아마카바에서 자신의 예술이 말하는 것,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살아가는 것을 실제로 삶에서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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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예린 (1995- ) yaerinpark.baguette@gmail.com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수료. 수원시립미술관 및 광주비엔날레재단에서 근무하였으며, 《제11회 아마도애뉴얼날레_목하진행중》(2023, 아마도예술공간)에 기획자로 참여하였고, 《레테》(2023, 서교예술실험센터)와 《매끄러운 세계와 골칫거리들》(트라이보울, 2024)을 공동기획하였다.
1) 타비타 르제르, 프랑스 파리 출생, 작가 홈페이지: https://tabitarezaire.com/.
2) 작품 링크: https://vimeo.com/114353901. 이후 본문에서 언급되는 작품들은 다음 링크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https://vimeo.com/tabitarezaire; 〈아프로 사이버 저항〉의 내용은 논문으로도 발표되었다.
Tabita Rezaire, “Afro cyber resistance: South African Internet art,” Technoetic Arts: A Journal of Speculative Research 12: 2/3 (Dec 2014): 185-196.
3) “Tabita Rezaire / Exotic Trade / 2017,” Goodman Gallery,
4) Eleanor Ford, “Artist Profile: Tabita Rezaire,” Rhizome, 1 February 2018,
https://rhizome.org/editorial/2018/feb/01/artist-profile-tabita-rezaire/(2024.12.21. 최초검색).
타비타 르제르, 〈궤도 디아파종〉, 2021, 비디오 설치,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목조 돔, 의료용 솜),
가변 크기, 44분 44초, 연속재생, 사진: 직접 촬영.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